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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폭탄 이야기-에드워드 텔러 그리고 스타니스와프 울람카테고리 없음 2024. 9. 15. 17:53
왼쪽:에드워드 텔러/오른쪽:스타니스와프 울람 위의 초상화는 에드워드 텔러와 스타니스와프 울람을 그린 것이다.
둘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둘의 이름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인 수소 폭탄의 메커니즘에 붙어 있다.
텔러와 울람은 2차대전 당시 로스 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였다.
텔러는 로스 앨러모스에서 베테와의 갈등으로 내파 연구부에서 빠진 후,
본인이 본래부터 관심 있었던 수소폭탄, 즉 핵분열 무기의 고열고압으로
경원소를 융합하는 연구를 처음부터 했다.
반면 울람은 내파의 유체역학적 계산을 진행했다.
최초의 핵무기 (트리니티) 텔러는 전쟁이 끝나고 미/소 냉전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핵분열 폭탄에서 융합 무기로의 발전은
당연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최초의 수소폭탄 디자인을 내놓는다. 이것이 바로 고전적 슈퍼(Classical-super) 라 불리는 디자인이다.
이 디자인은 아쉽게도 작동하지 않았다.
위 이미지는 핵분열 폭탄(구체) 옆에 핵융합 물질이 붙어있는 매우 단순한 디자인이다.
이것 이 바로 텔러의 고전적 슈퍼 개념으로, 핵분열 폭탄이 핵융합 연료를 점화하는데 쓰이는 중성자를 방출하면,
중성자가 중수소 실린더를 때리고, 중수소의 핵연소가 서서히 퍼져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 초창기 수소폭탄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역 콤프턴 산란 때문이었다. 중수소가 이온화될 때,
중수소를 이루었던 이온화된 전자가 열에너지를 흡수하여 폭탄 밖으로 탈출하는
이른바 역 콤프턴 산란 때문이었다.
이 반응 때문에 핵연소가 제대로 전파되기 전에 끊어져 버린다는 계산 결과가 나왔다.
이 계산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스타니스와프 울람이었다.
스타니스와프 울람 위 사진은 스타니스와프 울람이 페르미악이라는 중성자 분포를 계산하는데 쓰이는
고전적 아날로그 컴퓨터를 들고 있는 장면이다.
울람은 맨해튼 계획 이후 뇌종양을 얻었다.
성공적인 뇌종양 치료를 거쳤지만 그의 논리력은 조금 많이 손상되었다.
(수술 이후 울람이 병중에 핵 기밀을 누설했을까봐 의사들이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직관은-놀라울 정도로 분출했다.
울람은 몬테 카를로 방법 (확률적 샘플링을 이용한 수치해석 방법) 을 발견하고,
세포 자동차와 경제학에도 손댔다.
울람은 놀라울 정도로 다재다능한 수학자였다.
어느 날, 울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아내 프랑소아즈 아론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한 마디를 던졌다. '작동시킬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아요'
그리고는 심각해진 아내를 뒤로 하고 로스 앨러모스의 연구실로 떠났다.
울람이 발견한 것은 '압축' 이었다.
핵폭발의 유체역학적 충격파로 핵분열 연료를 추가적으로 압축하면 훨씬 많은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핵융합 반응에도 이러한 생각을 적용할 수 있을까?
텔러는 이 아이디어를 듣자마자,바보 같은 소리라고 여겼다.
다음은 실제 폭탄개발에 참여한 가윈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Ulam had said, “Well, let’s compress this stuff. It will burn faster.” Teller told him, no, that wouldn’t help. Because he had a theory—Teller being a very good physicist—that if you couldn’t make a hydrogen bomb with a cylinder of uncompressed deuterium you couldn’t make it with compressed deuterium, because everything just scaled. The rate of production of energy went as the square of the density, but the rate of loss of energy from the ions to the electrons went as the square and the rate of transfer of energy from the electrons to photons went as the square of the density. If it didn’t work one way, it wouldn’t work the other way. But Teller, as he soon recognized, had missed an important point, and when he sat down to write the paper he realized that.
위의 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텔러의 연구에 따르면, 역 콤프턴 산란은 밀도의 제곱에 비례해서 일어나는데,
밀도가 높아지면 에너지가 더 빨리 장치 외부로 탈출할 것이기 때문에다 (틀린 이론)
자세한 매커니즘은 기밀이지만 에드워드 텔러는 핵반응 속도가 압축하면 빨라질 것이라는 것을 (옳게) 깨달았고
충격파를 1차 원자폭탄에서 나오는 xray 복사로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xray로 2차 핵융합연료를 압축/점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추가로 핵융합 연료 중앙에 플루토늄 스파크 플러그를 넣어 압축을 추가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상세히 계산되어야 했다.
계산의 세부사항인 고온 고압에서의 중수소의 산란/흡수단면적,
복사 전달 방정식, 중성자에 의한 압축 손상 등이 모두 고려되어야 했다.
이 계산은 미국 전역의 슈퍼컴퓨터 시스템을 가진 연구소,
프린스턴에서는 휠러(파인만과 킵 손의 스승)과 존 폰 노이만(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가 맡았다.
둘은 IAS(프린스턴 고등연구소), 프린스턴 대학의 마테호른 프로젝트-B (bomb) 에서 일했고,
그 둘의 최종 연구 보고서는 열핵장치 이론의 바이블이라 불렸다.
위의 장치는 폰 노이만이 개발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컴퓨터로, 실제 열핵장치 계산의 일부가 위 컴퓨터에서 이루어졌다.
페르미의 제자인 가윈은 이론치를 바탕으로 실제 모델을 설계하는 일에 매달렸고,
불과 한 달 정도만에 장치를 설계해냈다.
마이크 장치는 아래와 같이 생겼는데 액화 중수소 8~5톤을 내부에 실었기 때문에 굉장한 냉각 시설이 필요했다.
남태평양의 엘루겔랍 섬에 폭탄은 설치되었고, 10메가톤 (나가사키 원폭의 500배 위력)을 내었다.
실험 전 폭탄 (코드네임 마이크) 를 조립하고 앞에서 찍은 모습이다.
폭발 전의 엘루겔랍 섬
폭발 후의 엘루겔랍 섬 (증발했다)
코드명 마이크가 폭발한 모습